아티스트를 위한 독립출판사 '닻프레스' 글 . 사진 이기환 커피가 준비되는 동안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테이블 옆으로 잘 짜인 책장은 한쪽 벽면을 꽉 채울만큼 크다. 진열된 책들은 모양이나 색상이 다채로웠다. 한눈에 보아도 시중의 책들과는 다른 면모가 있다. 우선 표지가 화려하지 않고 색감이 차분 했으며, 내지의 구성도 정갈했다. 촉감은 손에 익은 듯 부드럽지만 엮어진 매무새는 제법 단단하다. '기품 있는 책이다' 공동작업실닻프레스는 예술가를 위한 서적을 만드는 독립출판사다. 2012년 여름, 서울 성수동에서 문을 연 뒤 줄곧 책 만드는 일을 해오고 있다. 주로 사진가나 미술가의 작품집과 예술 관련 서적을 만든다. 예술서적이 홀대받는 우리나라에서 작품집을 꾸준히 만드는 모습에서 창업자(주상연 대표)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주상연 대표 역시 사진을 하는 예술가다. 그는 예술가의 작품이 효과적이며 진실하게 대중과 소통할 방법을 오래전부터 탐색하고 있었다.미국 유학 시절, 주 대표는 현지인 친구의 작업실에 초대받았고 그곳에서 포트폴리오 북을 직접 만드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내지를 프린팅하여 접지와 재단을 거쳐 실제본을 한다. 잘 고른 천에 심을 넣어 양장하고 책등에 풀을 발라 양장된 커버를 씌워 붙인다. 표지의 금박을 한 영문 레터링이 품위를 더해준다. 전통적인 수제 책 만들기 과정이다. 이렇게 한권의 양장본이 탄생하는 광경은 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본격적으로 센터 포 더 북 (San Fransico Center for the Book)에서 '책 만들기 과정' 을 마스터 한 주 대표는 졸업을 기다렸다는 듯, 서울로 돌아와 유학에서 얻은 영감을 실현해 나갔다. '창조적 영감을 구현하는 공동작업실' 닻프레스는 이렇게 탄생했다. 책장을 등진 벽 뒤에 작은 방이 있다. 벽면에 사진 작품이 걸려있고 한 가운데는 8인용 원목 테이블이 대각선으로 놓여있다. 단순하고 심심할 법한 공간을 극적으로 만들고 있다. 가구나 소품이 없는 이 방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위한 사색의 공간인 동시에 토론의 공간이다. 예술가들과 기획자, 디자이너가 이 극적인 테이블에서 서로의 영감과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모습이 그려진다. 자리에 커피잔이 놓이는 때를 맞춰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주영 실장은 자신을 닻프레스의 창립 멤버이며 주상연 대표의 제자라고 소개했다. "2012년 4월 창립하던 때부터 일하고 있어요 대표님과 저를 포함해서 모두 6명이 일하고 있죠." "각자 맡은 부분이 있을 텐데, 실장님은 어떤 파트죠? 기획이라던가 디자인이라던가" "우리는 모든 제작과정을 함께하고 있어요. 기획과 디자인, 인쇄와 제작이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지죠. 제가 선임이지만 하는일은 같습니다. 아이디어를 함께 논의하고 업무도 함께 나누어서 하죠."발터 그로피우스 (바우하우스 설립자)는 공동작업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팀 안에서의 원활한 소통이 창의력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었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 모르게 바우하우스와 닮아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이탈리아 장인처럼마주 보이는 문 안쪽으로 몇몇 사람이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대화에 집중하려 했지만 문 안쪽으로 보이는 흰색 방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궁금해서 번번이 말미를 놓친다. 그래서일까. 정 실장은 대화를 잠시 멈추고 방의 안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이곳은 공동작업실이에요. 여기의 모든 책이 만들어지는 공간이죠. 디자인부터 인쇄, 재단, 제본까지 원스톱으로 이루어져요." "여기에서 인쇄를 한다고요? 하지만 인쇄소 특유의 롤러 소음이나 잉크 냄새가 전혀 없네요" "디지털 인쇄기를 사용하고 있어요. 소량의 도서를 인쇄하고 사진집과 같은 고퀄리티의 이미지를 뽑아내기 위해 가장 적합한 방식이죠."작업장 안으로 들어서자 밖과는 극히 대조되는 전경이 드러났다. 제일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한쪽 벽면에 기다랗게 놓인 대형 디지털 인쇄기다. 인쇄기 주변으로 제본기, 재단기, 커버 메이커, 핫프리스기 등이 책이 만들어지는 동선에 따라 알맞게 배치되어 있었다. 인쇄소와 공방을 적절히 섞어 놓은 듯하다.아까부터, 에이프런을 두른 여직원이 출력물을 머리위로 반복해서 올려보며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그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아는 정 실장은 출력물을 형광등에 한차례 비추고 내린다. 그리고 종이 위의 한 곳을 짚으며 '여기 같다'라고 짧게 말한 뒤 가볍게 미소 짓는다.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여유와 적확함이다. 전통적으로 '책만드는 일' 은 중세 유럽의 도제 방식으로 전수되어 왔다. 장인이 도제에게 노하우를 전승했고 도제는 조판 기술과 인쇄기술, 제본 기술을 연마 하면서 책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책은 당시에 전 유럽을 통틀어 3만여 권에 불과했고 자연스레 책의 가치는 그만큼 귀했다.아날로그의 활자와 조판, 인쇄방식이 디지털로 바뀌었지만 닻프레스의 책 만들기는 본질적으로 도제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선임의 노하우가 후임으로 전승되고 이들은 모두 편집을 하는 디자이너이자 인쇄기를 다루는 기술자이며 제책을 하는 공예가다. 느릿느릿, 신중하게 만드는 책은 겨우 일주일에 50여 권에 불과하지만, 이 책들에게는 대형서점의 여느 것과는 다른 풍모와 귀티가 베어난다.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들었다는 그것처럼. 이들에게는 책 자체가 작품이다. 예술적 친절책을 작품으로 여기는 이들의 작업의식은 작가와의 공동작업에서 잘 나타난다. 작품집은 예술가와 공동으로 만든 작품이며, 넓은 의미에서는 예술가의 작품 활동이라는 연장선에서 행해지는 공동작업인 셈이다."작품을 어떻게 담아내는가 하는 것부터 종이를 고르고 인쇄물을 교정하고, 바인딩 하는 방법까지 작가와 의견을 나누며 책을 만들어 갑니다. 특히 사진집의 경우, 반복적인 테스트 프린팅을 거쳐 색감을 찾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작품의 오리지널리티를 재현하는 것은 협업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작가가 원하는 작품집을 만들기 위해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 공동작업을 하는 것이죠."공동작업은 주 대표가 말하는 '무작위적인 예술적 친절' 이라는 그의 예술철학에서 비롯한다.예술가들의 작품은 책을 통해 기록되어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즉, 예술 본연의 아름다움과 선함이 책이라는 매개체로 사람에게 전이된다는 의미이다.이러한 예술적 친절은 좀 더 다양하며 체계적인 방법으로 구현되고 있다. 책 제작 외에도 작품 전시와 스튜디오, 북스토어 그리고 매거진을 연계하여 작품 활동을 돕고 있다.자체적으로 발간하는 매거진 '깃' 은 진솔한 대화를 통해 대중에게 작가를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시각 예술 분야 아티스트를 위한 지원프로그램으로 '북메이킹 스튜디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이것은 작가들의 작품을 맞춤 책 만들기를 비롯하여 전시 공간과 스튜디오 등을 지원하는 프로그램 입니다. 약 3개월간 작업을 하며 완성된 책은 북 스토어를 통해 전시 판매를 하고 작품은 갤러리에 전시됩니다. 현업의 작가들은 물론 작가로 첫발을 내딛는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프로그램이죠." 독립출판이라는 항해시각 예술 분야의 전문출판사가 극소수인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처음에는 만든 책들을 호기롭게 대형서점에 넣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베스트셀러에 밀려 예술 코너 어딘가에서 맥없는 날을 보내다가 돌아오기 일쑤였다. 아직 토양이 기름지기에는 쌓인 낙엽이 부족한가 보다. 오히려 국외의 북 페어 (Book Fair)에서 판매가 쏠쏠했다. 애써 외국의 북 페어에 참가하는 것은 출판사 운영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만큼 국내에서는 어려웠다.호수에 돌 던지듯 그렇게 막막하던 출판가의 형편이 돌연 바뀌기 시작했다. 거대한 물결이 온라인 서점과 대형 서점의 방향으로 쏠려간 빈자리에 개성 있는 독립서점과 출판사가 기지개를 펴며 자라났다. 큰 가지 아래 겨우 자라던 치목(稚木)이 한 몸에 빛을 받듯이. 작년 서울아트북페어는 비 오는 궂은 날씨에도 수천명이 안팎으로 장사진을 이뤘다. 이틀 사이에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롯한 1만 3천여 명의 사람이 북페어를 찾았고 1만 8천여 권의 책이 팔렸다. 독립출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실로 뜨거웠다.닻프레스는 몇 해 전부터 서울아트북페어에 참가해왔다. 이들의 작품은 좋은 평과 많은 관심을 받으며 '시각 예술 분야 독립 출판사'로서의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어느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주상연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제가 받은 많은 예술적 친절을, 저 역시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어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정원을 가꾸는 것과 같아요. '닻'은 뿌리와 중심을, '깃'은 공기 지향적인 특성이 있는 것처럼 영감과 역할을 의미합니다. 책이 우리 인생에서 닻 역할을 하고. 항해에서 닻도 그런 역할을 하니까요."지금부터는 '예술적 친절' 이라는 선물을 실은 닻프레스의 멋진 항해를 기대해 본다. 주상연 대표가 해외 출장중인 관계로 '엘르 데코' 에 실렸던 인터뷰 기사를 정리하여 올린다. <닻프레스 주상연 대표와 인터뷰> 사진작가이면서 수제 책 공방을 열게 된 계기는?사진작가에게 좋은 사진집을 만드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전시를 통해 작품을 보여주는 것은 어떤 제한이 있지만, 책을 통해 시공간을 넘어 작업을 알리고 보존하고 소통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사진집을 전문적으로 만들수 있는 출판사가 많지 않다. 작가들의 창작도 중요하지만 교육, 전시, 출판과 같은 기반이 되어주는 예술적 토양이 사진예술을 성장 시킨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양한 사진작가들의 작업을 소개하고 창작을 지원하는 의미에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책을 만드는 일 외에 닻프레스에서 하는 일은?작가들의 작품집을 함께 만들고 창작을 지원하는 '북메이킹 스튜디오 프로그램' 을 운영하고 있다. 구의동에 새로 오픈한 북프로젝트 스페이스 다크룸 (D'ARK ROOM)에서는 사진과 책을 중심으로 한 전시와 렉쳐, 교육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직접 책을 만들어보는 워크숍을 진행하고 일년에 한 번 아티스트 인터뷰 매거진(깃)을 발행한다. 출판과 연계하여 경기도 광주에 자리한 닻미술관에서는 다양한 전시를 기획해 선보이고 있다. 언제부터 이 많은 일을 계획하게 되었는지?사진작가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2006년 샌프란시스코로 떠나 4년간 살았다. 샌프란시스코의 SFAI(San Francisco Art Institute)에서 사진공부를 하면서 만난 친구 중 한명이 수제책 공방을 운영했는데, 그곳에서 책을 만드는 일을 했다. 다양한 워크숍과 전시를 통해 책 만들기를 가르치는 비영리단체 센터 포더 북(San Francisco Center for the Book) 역시 롤모델이 되었다. 또 나의 스승인 린다 코너(Linda Connor)를 도와 '포토 얼라이언스(Photo Alliance)' 라는 비영리 사진 단체의 일을 함게 했는데, 이 단체는 아티스트, 학생, 일반인이 연계된 풍성한 강의와 워크숍을 열고 이를 통해 사진가를 후원하고 사진문화를 조성하는데 힘 쓰고 있는 곳이다. 이런 모든 경험이 닻프레스와 닻미술관의 바탕이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면서 많은 영감을 얻은 것 같은데?무엇보다 자연을 가깝게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샌프란시스코의 버클리 북쪽의 언덕 위, 넓은 정원이 딸린 오래된 1950년대 목조 주택에서 살았다. 서울의 아파트에서 느끼지 못했던 땅을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낡은 집과 정원을 수리하고 가꾸는 일을 통해 예술과 삶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체험했던 것 같다. 지금도 집을 만드는 일과 정원을 가꾸는 일이 책을 만들고 사진작업을 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닻프레스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닻프레스와 미술관은 북메이커, 디자이너, 사진가 등 여러 역할을 맡은 전문가들이 함께 일하는 일터이자 작업공간이다. 우리의 프로젝트 공간을 통해 사진과 책을 매개로 아티스트와 관객이 어울려 예술과 문화를 소통하는 유기적인 공동체로 성장했으면 한다. 닻프레스라는 정원의 여러 나무들이 건강하고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이곳에서 일하는 모두가 한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만드는 책과 공간을 통해 아름답고 참된 예술적 영감을 삶 속에서 가까이 전할 수 있길 꿈꾼다.